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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출판

나무에 손바닥을 대본다(박천순 시집, 예서의시018)

by 양정섭 2021. 12. 14.

눈으로 들어온 풍경이 몸의 적막을 깨우고 마음을 흔들다

박천순 시집 ≪나무에 손바닥을 대본다≫는 눈으로 들어온 풍경이 몸의 적막을 깨우고 마음을 흔들어 내가 완성되는 과정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이 풍경에는 아름다운 자연뿐 아니라 치열한 삶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다.
이 시집은 ‘하루는 가늘다’라는 시로 문을 연다. 그리고 총 5부로 나누어져 있다. 여는 시 <하루는 가늘다>는 부질없이 바쁜 나날 속에서 위태하게 건너가는 허리는 아프고 가늘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손을 펴서 무언가 잡으려고 하지만, 읽을 수 없는 우주는 대답 없이 저물어간다. 그럼에도 하루는 포기하지 않는다. 피 흘리면서도 안식을 줄 바닥에 뿌리내리기 위해 몰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1부는 주로 ‘가족의 사랑’ 시를 중심으로 엮었다. <바다가 사랑이다>에 나오는 어머니의 사랑은 우주의 지속성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바지락칼국수>, <감자 옆에 감자 옆에 감자>에서 보듯이 가족은 한 식탁에 둘러앉아 코 훌쩍거리며 밥을 먹고, 갈고리 같은 손이 닮아서 감출 수 없는 사랑의 대상이다. 
2부는 ‘연인과의 사랑’의 시를 중심으로 엮었다. <나무 그림자>에서 보듯이 연인은 어쩌면 동시에 태어난 존재인지 모르지만 영원히 같은 빛깔을 유지하는 연인은 없다. <사랑의 눈동자>에서처럼 사랑하는 연인을 너무나 당연하게 마구 사용한 결과 사랑은 낡아간다. 그러나 이미 눈을 빼앗긴 사랑은 서로에게 다시 돌아가 콩나물국을 끓이는 일상을 이어간다. 
3부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를 중심으로 엮었다. <마음에 바람이 분다>에서 보듯 우리 마음엔 늘 바람이 일지만, 켜켜이 숨죽이고 살아간다. 마음도 한 번쯤은 무한한 공중에서 맘껏 펄럭이고 싶지 않을까! <카르디아>를 읽고 쉴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더듬더듬 눈물 떨구는 마음의 하얀 어깨를 꼭 안아주길 바란다.
4부는 ‘길’ 위의 시를 중심으로 엮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길 위에 있다. 그러나 <길을 걷다>에서 보듯 길의 속내는 좀처럼 읽을 수 없다. 호흡이 촘촘하도록 그저 걷고 또 걸을 뿐이다. <5월에 태어난> 나는 숨이 멎을 때까지 걷고 발자국이 시가 되는 축복을 바라며 고통을 숨기고 명랑한 발걸음으로 노래하며 걷는다.
5부는 ‘계절-봄’을 중심으로 엮었다. 봄은 생명과 소망의 계절이다. 절망과 어둠 속에서도 형용사들이 꼬물꼬물 일어나 우주의 빛을 끌어모은다. 여름으로 내닫는 숲은 웅장한 오케스트라다. 밤이 일찍 오는 가을을 지나 한 해의 문을 닫는 손은 갓 지은 행복을 고이 싸서 내일로 넘긴다. 다시 출발하는 봄이다.

 

나무에 손바닥을 대본다(박천순 시집, 예서의시018, 예서 발행)



[ 시인의 말 ]

지나가는 시간을 물에 녹여내니
흘러가지 않고 남는 순간들이 있었다.
두 손으로 건져내어 이름을 붙이고
나뭇가지에 달아주었다.
멀리서도 보고 싶어서 그랬다.
가끔은 나뭇가지가 내 쪽으로 휘어지기도 하였다.

어설픈 사랑이나, 늘 기도하는 손길
꼭 잡아주기를!


[ 차례 ]

하루는 가늘다

1부
복/ 바다가 사랑이다/ 하롱베이/ 바지락칼국수/ 거품, 또는 희망/ 슬도/ 감자 옆에 감자 옆에 감자/ 나무에 손바닥을 대본다/ 사랑해, 사랑 해/ 5월 곰배령/ 눈, 눈, 첫눈/ 알리움/ 견딤/ 보물찾기/ 고마워/ 아버지 바위/ 눈, 발레리노/ 아직 전송되지 않은 풍경/ 수국

2부
매화 꽃잎 화르르 떨어지고/ 나무 그림자/ 정읍 허브원에서 만나요/ 사랑의 눈동자/ 봄날의 동화/ 화담숲의 편지/ 겨울 산은 고요하다/ 풍경은 지워지고/ 귀고리/ 허밍버드/ 노부부/ 밤 없는 달/ 에필로그/ 해 질 무렵/ 미라의 시간/ 솔잎은 사랑이다/ 소금산 섬강/ 가을에/ 갱년기

3부
아침이 오는 방식/ 나무/ 밤낚시/ 마음에 바람이 분다/ 카르디아/ 내가 아닌 것 같다/ 구름들/ 발효되는 글자/ 읽기 쓰기/ 우연과 인연 사이/ 리셋/ 나를 벗어나는 몸/ 수수한 날/ 호수를 깨우는 비/ 블랙커피/ 노을/ 어색한 악수

4부
안개의 골목/ 길을 걷다/ 신발/ 5월에 태어난/ 서울 둘레길 완주하다/ 거울, 당신/ 사소한 하루/ 거미/ 울릉도 엽서/ 나는 태후사랑 염색방에 간다/ 일일 드라마/ 김치 우화/ 초록시집/ 잠의 삼한사온/ 연꽃 풍경/ 양말처럼 젖으렴/ 엘리스의 시간

5부
봄이 온다니/ 담장 가득 아지랑이/ 나를 흐르게 하는/ 봄 마중/ 한강 가에서/ 봄/ 물감/ 숲의 합주/ 구봉도 낙조 전망대/ 장마/ 소나기 그치자/ 인정전 꽃살문/ 어떤 기억은 향으로 남는다/ 마니산 노송(老松)/ 문을 닫는 손은 곱게/ 가을밤은 일찍 온다

[해설] 수도에 가까운 몰입과 황홀의 이미지즘_(민용태 교수)

 


[ 책 속으로 ]

<하루는 가늘다>

하루는 허리가 아프다 허리띠를 졸라맨다 나는 걸어간다 그대는 나를 모르는 척 한다 우리의 만남은 몽상의 문턱에 걸린 무지개, 거울 속 눈동자에 물을 뿌린다 흩어진 글자들이 새털처럼 날아다닌다 손을 펴도 잡히지 않는다 손가락 끝에서 풍문이 흘러나와 변방을 적신다 속절없이 아픈 외계인의 언어, 질문도 대답도 없는 하루가 저물어간다 몸은 여전히 읽을 수 없는 우주, 위태하게 건너가는 허리, 적막이 몸을 감싼다 혁명도 가슴도 없다 피 흘리는 망막은 언제쯤 바닥에 뿌리 내릴 수 있을까? 여위어만 가는 하루 하루 몰입, 하자 하자 하자

<바다가 사랑이다>

물결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숨 쉬고 싶을 거야, 모로 누운 몸 사이로
은빛 멸치 떼 물살을 가르고 튀어오른다

참았던 숨을 내쉬어 보자
비늘이 있다면, 온기가 있다면 더 잘 자랄 거야
바다는 토닥토닥 물결뚜껑을 매만진다
햇살 따라 장독 덮개를 갈무리하던 어머니처럼

간밤 비에 말갛게 닦인 바다가 빛난다
이제 곧 하얀 포말 꽃이 필 테고
깊은 바닥 층층 물고기 떼 분주해질 거다
나는 폭신한 해변을 걸으며 마음껏 상상한다

오늘의 물결 아래 어제의 물결, 작년의 물결, 그 이전의 물결, 맨 밑의 물결
시간이 건너갈 때마다 무거워진 어깨를 무너뜨리고 누웠을 거다

숨소리가 멎고
숨소리가 바닥이 되고
숨소리가 먹이가 되는

방금 잡은 멸치 하나 손바닥에 놓고 들여다본다
너무 꼿꼿해서 아프구나

죽음과 생명이 끊임없이 몸을 바꾸고
푸르게 푸르게 익어가는 바다
이 많은 숨소리의 환생이 너무 눈부셔서 아프구나

<풍경은 지워지고>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풍경이 지워지고
나는 눈발이 쓰는 날것의 시를 읽습니다
펄펄 끓는 당신을 읽습니다

굵은 눈송이가 빗금을 그으며 내리다가
어느 순간 직선으로 뛰어내립니다
그러다 주저앉습니다
저 눈발은 내 마음 어느 바닥쯤에 닿았을까요
공중에서 난무하던 흰 글씨들
내 안으로 전부 추락합니다

내 가슴은 녹아내린 당신으로 흥건합니다
시가 되어 찾아온 당신,
마침표가 없는 당신으로 인해
마음은 오래도록 젖어 있습니다

눈은 아직 그칠 기미가 없고
당신이라는 풍경만이 자꾸자꾸 겹쳐집니다

<사랑의 눈동자>

태초부터 사랑이었다 사랑을 따라 나는 갔다 사랑도 나를 따라 왔다 사랑이 가슴 위를 걸어가며 촉수로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 사랑의 폭신폭신한 살결을 옷이나 이불로 사용했다 사랑은 조금씩 낡아가기 시작했다

사랑이 죽으면 도서관에 보관된 끝없는 눈동자가 된다 골수에 한 번 새겨진 사랑, 남기려거든 눈빛을 잃지 말아라 나는 이별을 이길 모든 무기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랑은 죽은 자의 책이 되어 내 눈동자를 가져갔다

사랑의 힘은 흘러간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따가운 가시들, 모든 사랑을 가진 그가 또 다른 사랑에 목말라 하듯이 사랑은 돌아오리라 그리고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콩나물국을 끓이리라 안개가 걷히고 다시 길을 떠나는 새벽이다

 


[ 출판사 서평 ]

시가 나를 만들어왔다.
시를 쓰며 만나는 인연에 감사한다.

지은이 박천순은 시와의 긴 사랑과 전쟁, 가슴앓이를 하면서, 수없이 쓰고 지우던 시간이 내가 되었다고 한다. 돌아보니 시가 나를 만들어왔다며, 시를 쓰며 만나는 인연에 감사한다. 시가 있어 남은 삶도 아프고 설렐 것을 생각하며, 평범한 일상에 만나는 작지만 소중한 느낌을 독자에게 전하고 싶다고 한다.
시집 ≪나무에 손바닥을 대본다≫는 무엇보다도 긍정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았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부정적으로, 비판적으로 대상을 바라본다면 시대를 앞서가는 뛰어난 지식인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한 작품이 독자를 일깨우고 사회를 각성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는 비판의 역할보다 ‘사랑’과 ‘긍정’의 역할을 하는 것이 옳다. 바다처럼, 어머니처럼 무한한 사랑의 마음을 베이스에 깔고 그 위에 다양한 시 건축물을 세웠다. 튼튼하고 예쁜 집도 있지만, 못생기고 거친 집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집들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사랑의 바탕이 튼튼하기 때문이다. 작은 한 권의 시집이지만, 이 책이 삶의 길 위에서 순례자인 우리 모두에게 자신의 삶을 새롭고, 귀하고, 신기하게 보는 순례자의 마음을 회복시키리라고 믿는다. 이러한 문학 본연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 이 시집은 가치가 높다.


[ 지은이 박천순 ]

지은이 박천순은 초등학생 때부터 ‘읽기, 쓰기’를 좋아했다. 문학소녀, 글 잘 쓰는 아이로 불리는 게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시를 배우고 쓰려고 하자 자신이 한없이 무능하고 초라하게 보였다고 한다. 지은이 박천순은 시와의 긴 사랑과 전쟁, 가슴앓이를 통해, 그리고 좌충우돌 흔들리며, 수없이 쓰고 지우며 시를 썼다..
2011년 ≪열린시학≫ 가을호에 <몰포나비> 외 3편으로 등단하였다. 제9회 정읍사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시집 ≪달의 해변을 펼치다≫(2016)를 출간하였다. 


[도서명] 나무에 손바닥을 대본다
[시리즈] 예서의시018
[지은이] 박천순
[펴낸곳] 예서
변형 국판(128×210) / 164쪽 / 값 10,000원
발행일 2021년 12월 15일
ISBN 979-11-91938-04-3 03810
분야: 문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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