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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출판

정석교 시선집(예서의시015, 정석교 시집)

by 양정섭 2021. 8. 18.

생업과 시업을 견디어낸 한 시인의 역정 조명

정석교 시인의 ≪정석교 시선집≫이 ‘예서의시015’로 출간되었다. 이 선집은 시인의 생전의 시집 ≪겨울 강 푸른 뜻≫(2020) 등 일곱 권에서 뽑아 엮은 것이다. 이 선집을 통해 강원도 삼척이라는 특정 지역에 뿌리를 두고 생업과 시업(詩業)을 견디어낸 한 시인의 역정(歷程)을 비춰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문학에 대해 초지일관 흔들리지 않고 일목요연하게 투철하게 가꾸어나간 시인의 시정(詩情)과 열정과 순정(純情)을 선집 곳곳에서 목도하게 될 것이다. 비록 시인이 이 땅에 두고 간 시의 전편(全篇)을 음미하고 통독하진 못한다 해도 이렇게나마 시인의 육성(肉聲)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의 몸으로 감당했던 그 당면 문제들과 함께 그는 그곳에 있었고 또 그는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그의 시는 이곳에서 이렇게 동시에 함께 부활하였다. 


[책 속으로]

낯선 포구에서

낯선 포구의 황량함이란 늘 친밀하지 못하게 내려놓고 떠나는 것이다 긴 물금 배웅하는 숨 가쁜 노을 여객선에서 머무른 흔적을 쫓던 기대감은 터미널 유리창에서 분신된다 친밀한 어둠을 통해 기실 뚜렷해지는 혼자라는 불안스런 감각기능은 침묵 속에 숨어 한없이 메마른 환절기를 앓는다 갯바위 이우는 청량감보다 여윈 잠 청하는 포구의 여인숙에서 홀로 남겨진 낯 설움은 늘 달큰한 법이다 낯설음은 나로 하여금 수심(愁心)에 찬 마음이 되고 수심(水深)에서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된다 낯설음 품은 미지의 것을 위해 기꺼이 밝은 아침을 기억해두지 않는다 낯선 포구에서는, 몸을 가벼이 할 수 있는 시간은 없다


가난한 시인의 안주

몸은 없어져도 이름만은 세상에 남을 명태,
세월에 숨어버린 명태 건지러 자맥질합니다
새끼인 노가리는 애기태, 크기에 따라 왜태, 중태, 소태, 그
물로 잡은 망태, 낚시로 낚은 조태, 원양어선에서 잡은 원양
태, 근해에서 잡은 지방태, 강원도에서 나는 것은 강태

둘러앉은 저녁 식탁 뚝배기에서 어머님 손길이 끓어 오릅니다
갓 잡은 생태, 얼린 것 동태, 건조 시키면 건태, 꾸들꾸들하
게 반쯤 말린 코다리, 대가리 떼고 말린 무두태, 포로 만든
북어포, 생명태는 선태, 잡히지 않을 때 귀해서 부르는 금태

계절 따라 망태기 몇 놈 건지며
명태 입만큼 큰 웃음 던지는 할아비
바다는 늘 두렵다 했습니다
알을 낳은 뒤에 잡은 것은 꺾태, 맨 나중 어기에 잡힌 막물
태, 초겨울 도루묵 떼 쫓는 은어바지, 음력 섣달 초순 잡히는
섣달받이, 춘태, 추태, 동태 계절별 부르는 별칭

매서운 밤 섬돌 신발들이 다 얼었는지
삼촌은 설 지나도 올 줄 모르는 깡촌 그 골짝에서
얼렸다 녹였다 황태, 하얗게 말린 백태, 검게 말린 흑태, 수
분 빠진 깡태, 파손된 파태, 속이 붉고 딱딱한 골태, 말리다
고랑대 떨어진 낙태, 날씨가 따뜻해 물러진 찐태, 여름에 말
려 곰곰한 구데기태

가난한 시인의 안주가 시가 되어도 좋을
기막힌 별칭, 명태
술잔 속 유영하는 별칭들 건져 올립니다 


들길에 피는 뭇꽃처럼 살리

바람이 지나가다 머문 들길에 핀 뭇꽃들이 저마다 아우성을 치면서 나늘 보라 한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무언의 눈 맞춤으로 나누는 저만의 외침을 전하려 한다

─꽃잎이 핀 공간만큼 햇살을 마시며
꽃으로만 살고 싶은데
지나가는 바람은 어서 자리를 내놓으라 한다네─

들길에 피는 뭇꽃이라는 것
항쟁으로 저마다 낙화로 분신할 뿐인데
밤이든 낮이든 소소한 가을 빈터에서
분신으로 날리는 꽃들의 외침을 듣는다

노랗게 부풀어 오른 달 속을 보며 청승맞게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하늘을 찢듯 울리는 개 짖는 소리, 동료가 아닌 이방인의 발걸음을 경계하는 경고의 선전포고 후각이 몸서리치도록 예민해서 금세 알아버린 그들의 매력에 되돌아서는 발걸음이 무서워진다

─매일 맞대며 알은체하는 얼굴이 무서워질 때가 있다
이 밤 지나면 환한 얼굴로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해 보아도 자꾸만 뒷걸음쳐지는 비굴함─

들길에 핀 풀꽃보다 못한 가여운 이들이여! 
결빙의 땅을 다지며 아름다운 생을 준비하는
들길에 피는 저 뭇꽃을 잠시 닮아 보게


검은 전사

내 유년, 탄광촌 아버지들을 검은 전사라 불렀다

초여름 감나무 가지 사이 숨은 왕매미 맹렬히 울던 날, 긴 잎 느티나무 굵은 가지 무수히 부러졌다 달빛 흔들린 탄광촌은 바람을 탄 블랙홀이었다 가슴에 가라앉은 울음이 산비탈을 휩쓸었다 자정 넘어 어머니들은 성긴 머리칼을 나부끼며 비보를 채근했다 광차에 실려 온 실낱같은 희망을 외면한 아침, 막장이었다

꽃상여 떠나는 길, 비가 통곡했다 장송곡처럼 울리던 장대비 탄광촌을 쓸어가듯 내렸다 씻김굿 추렴하듯이 흘린 저탄장 검은 눈물 생의 유품으로 남은 어머니 발뒤축을 흉물스럽게 물어 뜯었다 회차할 수 없는 갱도로 다시 보내야 했던 검은 땅,

붉은 감이 경계도 없이 하늘에서 붉게 아우성이다 바라지창 아래 걸린 먹빛 작업복, 내 유년의 목록에 기억된 탄광촌 아버지들처럼 사택의 젊은 어머니는 검은 전사가 되셨다


[출판사 서평]

시인의 영전에 술 한 잔 바치듯, 일곱 권의 시집 가지런히 엮어...

이 선집은 첫 시집 ≪산 속에 서니 나도 산이고 싶다≫(2001)로부터 ≪겨울 강 푸른 뜻≫(2020)까지 일곱 권의 시집에서 누군가 아무리 애써서 고르고 누군가 아무리 애써서 엮었다 해도 시인의 전집(全集)은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이 선집 제일 앞의 열린 시 <하늘 문>을 마치 시인의 영전에 술 한 잔 바치듯이 권두에 가지런히 놓는다. 그리고 천천히 기(旣) 시집 제목으로 부를 나누면서 형식상으로는 7부로 나누었으며 아쉽지만 총 92편을 수록할 수밖에 없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먼저 제1부에 해당하는 <산 속에 서니 나도 산이고 싶다>에서 시인의 심성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이 많다. 삼척 ‘오분리’ 마을 사람들의 입담과 정감을 적나라하게 형상화하면서도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한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섬세한 심성은 자갈길, 비탈길에 아무렇게 피어있는 들꽃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선집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남긴 많은 시에 등장하는 혈육들에 대한 애정도 그의 성품일 것이다. 그의 품성은 그의 상상력과 더불어 산에 가면 산이 되고 정라진 어부를 만나면 어부가 되고 바다에 이르면 ‘아버지의 바다’가 된다. 
<꽃비 오시는 날 가슴에 꽃잎 띄우고>에서는 ‘이팝꽃’에서 고흐의 ‘해바라기‘까지 활짝 피어 있다. 이를 테면 ’꽃의 시편‘이라고 할 수 있다. 꽃의 생명과 꽃의 고요와 꽃의 평화가 다큐처럼 펼쳐져 있다. 그러나 그 꽃의 행렬은 풍경화나 정물화가 아니다. 이팝꽃에도 할머니의 설움이 서려있고 감꽃에는 누이가 말하던 눈물의 설화가 스며있다. 시인의 심성을 피해갈 수 없고 시인의 심성을 만난 꽃은 시인과 같은 시가 되었다. 또 꽃이 눈물이 되었고 시가 눈물이 되었다. 이쯤 해서 그를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치는 꽃의 시인이라 불러야 할 것 같고 ’는질는질 바람 타고 희롱하‘듯 꽃을 희롱하는 시인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차라리 뭇꽃 같은 시인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그대여 그대 있는 곳에서 혹시 시인처럼 외롭고 가난했던 해바라기의 시인 반 고흐 씨를 만나보았는가?
<딸 셋 애인 넷>은 자식을 둔 이 땅의 애비들이 어떻게 시를 더 읽을 수 있을까? 마음이 아픈 시는 더 읽지 않아도 이미 시가 되었다. ‘거울 정면 펼쳐지는’ 이 ‘낙조’ 같고 낙화 같은 시 앞에서 어떻게 또 시를 읽어야 할 것인가? 시도 시인도 마음 아픈 시를 만나면 허공을 잠시 응시할 수밖에 없으리라.
<바다의 길은 곡선이다>는 ‘저릿저릿한’ 바다와 ‘동무 같은’ 바다와 검푸른 바다와 아버지의 바다와 함께 바다의 시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물질 가는 사람들, 노량진에 자리 잡은 서울의 바다, 뱃전에서 오징어 채낚기를 하고 누이의 목소리가 부서지는 바다의 연애사를 증언할 ’명자집‘이 줄지어 서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물과 슬픔의 바다라고 불러야 할 ’여린 꿈‘이 무너진 그 ’세월‘의 시가 실려 있다. 시인을 곡비(哭婢)라 하는 비유는 평범한 비유가 아니라 어떤 상징이고 어떤 은유일 것이다.
<빈 몸을 허락합니다>는 그가 빈 몸을 이끌고 다녔던 탁발승(托鉢僧)의 떠돌이 시편들 같다. 그는 많은 곳을 떠돌며 시를 위해 탁발승이 되었고 탁발승이 되기 위해 또 많은 곳을 고행하듯 떠돌아 다녔다. 이 시편들에선 그의 행적과 그의 시가 유난히 성실하고 근면하게 보인다. 그는 시인을 무슨 훈장이나 깃발처럼 들고 다니지 않는다. 그저 저 차마고도 수행자들처럼 삼보 일배 하듯 순례하고 시 앞에서 고해성사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곡비(哭婢)>는 여린 곡비가 아니라 냉철하고 통렬한 곡비다. 특히 현실적이고 비판적인 안목이 돋보인다. 그러나 비판적이고 현실적이다 해도 예의 그의 시의 특장(特長)인 인간적인 면모와 사유(思惟)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회나 세상이나 시대를 향한 연민(憐憫)과 분노도 그의 인간적인 성정과 만나 반듯한 시편으로 완성된다. 하여 그의 시편은 거칠지 않고 언짢지 않고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숙연해 질 수 있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가 그곳에서는 곡비 알바 같은 것 하지 말고 ‘오분리’ 어디 쪼그만 편의점 사징님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겨울 강 푸른 뜻>에서 그는 들녘을 지나가는 서러운 기러기가 되었는가? 아니면 겨울 강 앞에서 무엇을 속죄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의 시가 능소화처럼 툭! 떨어졌다! 그의 시가 햇밤처럼 쩍! 펼쳐졌다! 이 선집을 비롯해서 그의 많은 시는 이제 독자의 것이 되었다. 그를 증언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외로운 시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 또한 시인의 운명이며 숙명일 것이다. 운명이나 숙명 앞에선 또 숙연(肅然)할 수밖에 없다!

 

정석교 시선집(예서의시015, 정석교 시집, 예서 발행)



[ 차례 ]

하늘문

산속에 서니 나도 산이고 싶다(2001)
오불진 사람들 / 자화상 / 들꽃 / 산속에 서니 나도 산이고 싶다 / 정라진 어부 천씨(千氏) / 아버지의 바다 / 죽서루(竹西樓)에서 / 삼척역

꽃비 오시는 날 가슴에 꽃잎 띄우고(2011)
이팝꽃 / 감꽃 일기 / 파꽃 같은 어머니 말씀 / 감자꽃 / 치자꽃 / 수선화 / 꽃비 오시는 날 가슴에 꽃잎 띄우고 / 수로부인, 꽃 꺾어 바치오며 / 능소화에게 묻다 / 밤느정이 / 석부작, 돌에 물을 주다 / 담쟁이꽃 / 들길에 피는 뭇꽃처럼 살리 / 고흐는 해바라기를 키우지 않았다

딸 셋 애인 넷(2013)
에필렙시 / 딸 셋 애인 넷 / 월계이발관 / 자화상 / 낙조

바다의 길은 곡선이다(2015)
오불진 사람들 / 서울의 바다 / 꽃숭어 피네 / 오징어 채낚기 / 출어 / 아침을 낚다 / 숨비소리 / 누이의 노래 / 실러갠스 / 등 / 20140416-0848-2-325(476) / 벚꽃이 눈물처럼 날리던 날 / 흉어기는 선술집이 어판장입니다 / 한사리 / 어물전, 바다를 장전하다 / 바다의 길은 곡선이다 / 바다, 봄빛 슬어놓고 / 낯선 포구에서 / 가난한 시인의 안주

빈 몸을 허락합니다(2017)
2월 화암사 / 간월암 / 어산불영 / 홍련암 / 꽃살문을 보며 / 배알문 / 심우도 / 윤장대를 돌리다 / 연등 다는 아침 / 늙으신 탑 / 무두불 / 비천도를 품다 / 빈 몸 / 물의 혜안 / 면벽을 풀다 / 푸른 몸 / 침 / 다비 / 설법이 끝날 무렵 / 베율로 가는 길 / 아하, 고불매 / 법당이 작다고 부처가 없으랴 / 울어라 울어 / 휴(休)

곡비(哭婢)(2019)
모란공원 / 고요하고 거룩한 밤에 / 사월의 비 / 워낭소리 / 불가촉 시인 / 개마무사를 보다 / 다정한 폐허 / 곡비 / 소금꽃 / 프로크루테스 침대 / 낙타의 등 / 아침마다 우화하는 남자 / 검은 전사

겨울 강 푸른 뜻(2020)
공복의 들녘 / 바람의 지문 / 동지 / 겨울 강 / 눈꽃, 피다 / 무화과 / 서리 / 능소화 지다 / 햇밤

[해설] 빈 몸으로 그린 자화상_남기택(문학평론가)


[ 지은이 정석교 ]

1962년 강원도 삼척 출생. 1997년 ≪문예사조≫ 시, 2016년 ≪시에티카≫ 수필 등단. ≪동안≫, ≪두타문학≫, ≪어화≫ 동인. 시집 ≪산 속에 서니 나도 산이고 싶다≫(2001), ≪꽃비 오시는 날 가슴에 꽃잎 띄우고≫(2011), ≪딸 셋 애인 넷≫(2013), ≪바다의 길은 곡선이다≫(2015), ≪빈 몸을 허락합니다≫(2017), ≪곡비≫(2019), ≪겨울 강 푸른 뜻≫(2020) 등 출간. 강원 작가회의 회원, 두타문학회 회원, 강원 공무원문학회 회원. 2020년 4월 15일 별세.

 

[도서명] 정석교 시선집
[시리즈] 예서의시 015
[지은이] 정석교
[펴낸곳] 예서
이메일_mykungjin@daum.net
전화번호_070-7550-7776
팩스_02-806-7282
변형 국판(128×210) / 161쪽 / 값 10,000원
발행일 2021년 07월 30일
ISBN 979-11-968508-9-0 03810
분야: 문학>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