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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출판

프네우마 시편__이상규 시집, 예서의시026__고요한 시, 미학적 풍경

by 양정섭 2023. 12. 12.

고요한 시, 미학적 풍경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미학적 존재이다. 인간이 가장 보배로운 미적 대상이며, 사랑이 듬뿍 담긴 최고 절정이 미학적 욕망의 대상이다. 일상의 삶속에서 언어의 자의적인 본질을 이용한 사물의 본질을 찾으려는 창의적인 노력의 결과물이 문학 작품이다. 인간 삶을 둘러싸고 있는 우주의 본질에 한걸음 다가서는 예술의 한 영역이 문학이다. 그래서 가치 있는 행위인 동시에 책임 또한 적지 않다.”(인터뷰 중에서)

이 시집은 시인(이상규)의 사유의 벌판에 피어난 들풀이다. “아무 말 할 것 없는 상태의 시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 귀향지”라고 시인(이상규)은 말한다.
그리스어로 ‘정신’이라고 번역되는 ‘프네우마(pneuma)’는 ‘호흡 작용(숨을 쉼)’을 뜻하지만 어디까지나 질료적 의미를 지닌다. 다음은 이 시집은 율려나 내면적인 율동의 미학을 강조한 작가의 시학적 바탕을 이룬다. 이 시집을 엿볼 수 있는 인터뷰 질문과 답이다.

“○이번 시집에서 유독 많은 시적 서사를 생각하게 하는 장시 ‘프네우마(Pneuma) 시편’은 기존의 어떤 기표 속에서 이해하는 것보다 작가의 육성을 직접 듣고 싶은 작품입니다. 특히 이 시를 관통하는 ‘바람’의 의미 혹은 ‘바람의 비밀’은 무엇인지요? 그리고 이 시에서 쓰인 일련번호는 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요? 아님 단순한 형식적 기호일 뿐인지요?
‘프네우마(Pneuma) 시편’은 100번까지 쓸 작정이었습니다. 의미를 부숴내는 백화작업, 언어적 질서를 깨면서도 상상하는 메시지를 포기하는 작업인데, 특히 바람이라는 존재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도 세상을 휘젓고 다닙니다. 무색공(無色空)의 존재가 시색(是色)의 상상을 불러주지만 역시 시색공(是色空)일 뿐인 허무를 유한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입니다. 인류가 멸망해도 이 우주에는 푸네우마의 바람이 가득 흘러다닐 것입니다.”(143쪽)

이 시집은 문학 주체에 대한 깊은 애정의 손길이 ‘평등에 대한 지향’으로 향하고 있는 현상이 일종의 트렌드를 보여준다. 시인들이 지녀야 할 바람직한 보편적 시각임에 틀림이 없다. 다만 인간 중심 문학사의 지향점이기는 하지만 계급의 평등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도 성취된 역사가 존재치 않는다. 결코 인간 세상엔 계급 평등이 본질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고대문학사에서 종교와 샤먼을 언급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등이 지나쳐 도리어 평등하지 못한 사회로 치달을까 우려스럽다. 학자들의 말 한 구절만 따와서 평등을 위해 혁명으로 치닫는 사회치고 평등이 정착된 나라와 사회를 보기가 어렵다. 니체가 말한 인간 중심의 미학이 너무 왜곡되어 신이 마치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인간 중심으로 너무 쏠리고 있다. 하나의 사과나무에 달린 사과 열매의 크기와 색각이 각각이듯 인간 결코 평등해질 수 있다는 말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일 뿐이다.
작가(이상규)는 “문학이 갖는 무한의 책임감을 느끼는 모든 독자들에게 바친다.”며 이 시집 발간의 소회를 밝히고 있다.


프네우마 시편(이상규 시집, 예서의시026, 예서 발행)


[ 책 속으로 ]

<구지 장터 양지다방>

석양노을은 갑자기 밀어 닥친다.
황홀한 색상의 혼합으로 된 바탕 그 위에는
미세한 겨울 나뭇가지나 전선
지나가는 바람의 흔적까지
도드라지게 드러낸다.
때로는 그 경계가 일순 다 지워지고
보석 같은 별빛과
늘 기다려지는 출렁이는 달빛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달성군 구지면 장터 양지다방
창문 너머 병풍처럼 둘러싼
신도시 아파트 불빛이 스러진
황혼녘 서쪽 하늘을 둘러칠 무렵
금속성 별빛 장석이 총총 달린
미니스커트에 흰 부츠를 신은
예쁜 청회색 한 마리 노새 닮은
양지다방 여주인

등에 짊어진 무거운 삶의 짐 보따리
내려놓을 땐 가끔 눈물이 섞여 있다.
그녀가 걸어온 삶은 굽고 기울어진 능선, 그
가파른 시간 금방 사라지는 양지다방
지금 황홀한 저녁노을이다.

채소 난전과 대장간 건너 
창원에서 올라온 나전칠기
담양에서 올라온 대소쿠리 
낙동강 타고 올라온 소금기에 삭은
비린내 나는 생선 난전
얽음배기 박서방, 혀짜레기 허서방
오일장 파장 길에 들러
쌍화차 한 잔 시켜놓고 손목
슬쩍 한 번 잡아주고 훌쩍 떠난
지난 사람의 그리움에

노을이 눈물방울에 
붉은 보석같이 박혀 있는
양지다방 미즈 리
그녀는 삶의 답으로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 눈물 쏙
빼놓는 여태 걸어온 능선 가파른 길을
쉬지 않고 달리고 있다.


<불타는 월인천강>

넓은 네거리
하늘이 좁아진 높은 빌딩
가득한 어둠
점멸하는 불빛이 
시들해질 무렵

교차로 푸른 신호등 불빛
달빛이 내려오고
별빛 쏟아진
푸른 강줄기
도심 네거리를 헤치며
저 먼 끝자락에 닿는
고요와 절멸

한낮동안 붐비던 차량과 사람들
흩어놓은 소음이 
월인천강에
뜬 무중력의 네온사인

그 불빛 흐려지는 끝자락에
이어진 어둠이 서서히 잿빛
기지개를 펼치고 있다.


<프네우마 시편>

6. 
눈이 참 어리석다.
이 땅에 내린 적설량과 강수량을
눈으로 헤아려내지만
잠자리 날갯짓에서 번지는
파동과 내 폐 속의 얼룩은
엑스레이를 거쳐 읽어낸다.
지난 시간 내 귀를 애무하던 
여자의 지워진 잔상을 
바람의 파동으로는 판독하지 못한다.
없는 세계를 보게 할 수 있는
활성화된 시제와 공간 속
정물화 같은 소나무 녹색 바늘이
존재의 눈금이다.


[ 차례 ]

살아서 버티는 일 외에는

1부 여우를 예찬한다
그레이스 M. 조 교수께/ 김선이 농업샘/ 구지 장터 양지다방/ 바람개비는 바람을 피해 누워서는 돌지 않는다/ 수박/ 나팔꽃/ 머리로 부딪치고 울기는 몸으로 운다/ 서로 다른 길로 가는 이들에게/ 여우를 예찬한다/ 아름다움/ 꽃들의 사랑싸움/ 대화/ 온 마을 가득 찬 꽃향기/ 출렁이는 강물/ 폼페이/ 수성못에 내려앉은 하늘/ 나의 작은 소망/ 생과 사/ 찾아준 봄/ 발해사론눈이 내린다/ 책과 화면 읽기/ 눈썹/ 이듕섭, 나는 너의 바람이야/ 겨울 매화/ 탐라국에서/ 화가 김수영/ 꽃집에서/ 계절

2부 월인천강지곡
안녕 잘가/ 불타는 월인천강/ 내 기거하는 공간은/ 천강월인/ 목수와 시인/ 천 개의 강물에/ 자작나무/ 무의 노래, 판매 중단/ 관음수월도/ 동화사 화림당 돌계단에서/ 오더/ 그대 입에서 내뿜는/ 오늘/ 성산포 바다/ 텅 빈 주점 첼리스트 연주/ 풍경/ 개화보 카렌더/ 나목/ 저녁 무렵/ 일몰/ 정박한 배들/ 존재의 풍경/ 비에 젖는 봄의 언어/ 봄에 피는 눈물꽃/ 북으로 읍루, 동남으로 창오와 창해/ 일요일 아침

3부 오피러스 마녀들
디오니소스의 축제/ 하늘로 달려가는 나팔꽃/ 장례행렬/ 요정의 서정/ 오피러스 마녀들/ 응시/ 길 위에 서 있는 풍경/ 백지/ 하바네라 곡에 출렁이는/ 유니워/ 민족서사극/ 박두을 할머니 우물/ 기하학적 문양/ 균열하는 언어의 섬/ 남루한 지식/ 어떤 여인/ 이소/ 꽃이 폈던 자리/ 헤르메스의 문장/ 산당화/ 순결/ 눈물/ 당신에게 귀를 기울여야 할 가을이다

4부 프네우마(Pneuma) 시편
프네우마(Pneuma) 시편

[인터뷰] 고요한 시, 미학적 풍경
이상규의 ‘프네우마 시편’ 서평(화가 전완식)


[ 이상규의 ‘프네우마 시편’ 서평 ]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저는 위대한 그림을 보게 되면 벅찬 감동과 동시에 ‘나도 저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납니다. 장엄하게 떨어지는 감동의 폭포수를 맞은 저는 그길로 캔버스 앞에 다가가 광활한 대지 위를 달리는 말처럼 붓을 타고 시공간을 아우르는 예술가의 특권을 누리며 행복에 젖어 들곤 합니다. 
이번에 출판되는 이상규 시인의 ‘프네우마 시편’을 읽고 대지를 달리는 말이 아니라 우주선을 타고 우주공간을 나르는 상상의 희열감을 맛봤습니다. 질박한 시골 뚝배기 같은 텁텁함이 쨍하는 5성급 호텔의 샤베트처럼 변모하고 무문토기에 담긴 삶의 애환이 첨단공학의 결과물과 비견되며 공존과 초월을 넘나드는 시어의 향연 말입니다. 
또한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명왕성이 행성에서 퇴출되는 사건처럼 사실이라 믿던 것까지도 다시 한번 본질의 근원적 물음으로 접근하여 사람을 ‘人間’이라 쓰는 이유를 알게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라는 인간, 그 사랑과 포용의 정신을 일깨워줌에 벅참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가 곳곳에 조각된 이상규 시인의 시어는 오벨리스크처럼 당당히 서서 시대를 아우르게 될 것 같습니다.”(화가 전완식)


[ 지은이 이상규 ]

시인이자 작가로서 글 읽고 또 쓰는 일과 함께 한옥 대목수 일을 배우고 있다. 1978년 ≪현대시학≫ 추천완료로 문단에 데뷔한 후 ≪종이나발≫, ≪13월의 시≫, ≪외젠 포티에의 인터내셔널가 변주≫ 등 시집 여러 권과 연구저술들을 발표하였다. 외솔학술대상(2000), 봉운학술상(2001), 대한민국한류전통문화대상(2014), 한국문학예술상(2015), 매천황현문학대상(2017)을 수상하였고, ≪13월의 시≫는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었다. 최근 한국의 전통미학의 원류를 찾아내는 글을 쓰고 있다.


[도서명] 프네우마 시편
[지은이] 이상규
[시리즈] 예서의시026
[펴낸곳] 예서
변형국판(128×210) / 152쪽 / 값 12,000원
발행일 2023년 12월 20일
ISBN 979-11-91938-56-2 03810
분야: 문학 >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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