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
강세환 시인의 신작 시집이 출간되었다. 만 일 년도 안 됐는데 연전에 상재한 또 그만한 분량(521쪽)의 시집을 내놓은 것만 해도 이미 한국 문단의 핫(hot)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문학의 위상을 물리적 분량으로 가늠할 순 없지만 작금의 문학 출판시장에서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단 외형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시인 특유의 ‘열정과 통찰’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어 작가의 역량을 또 한 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권두에 실린 작가 인터뷰 ‘고독의 즐거움’에선 시인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으며, 10부로 나누어 수록한 총 ‘342편’에 달하는 막대한 분량의 시집을 통째로 목도하게 될 것이다. 이 한 가지만 보아도 시가 지리멸렬한 이 시대에 시가 가히 폭발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야말로 시인의 ‘반복적인 너무나 반복적인’ 작가적 열정과 시에 대한 열망을 동시에 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시인의 말 ]
퇴직 이후 밥 먹고 시만 쓰면서 살았다. 심지어 꿈속에서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닌지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게 또 무슨 획기적인 것도 아니고 혁명적인 것도 아니고 고작 자기 삶의 기록이거나 시에 대한 사적인 사유(思惟) 정도일 텐데, 나는 끝없이 또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아무리 멋있게 말해도 한심한 어느 타이피스트의 자기만족이나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말은 이렇게 하더라도 버스 지나간 뒤에 혼자 손들고 있는 것 같다.
[ 책 속으로 ]
언어 특히 말로 드러난 것은 또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단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환상이 맴돌 뿐이다. 이면(裏面)은 끝내 얼굴을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시도 그렇고 언어도 그렇고, 세상도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정답도 없고 결론도 없다. 그러나 아침과 저녁이 다르고, 어제하고 오늘이 또 다르고, 다만 미제(未濟) 같은 사건만 반복되고 있다. 그래도 기표만 남은 언어라 해도 그의 치맛자락을 잡고 있어야 시가 된다. 그리고 지금 여기, 이 시조차 내가 발명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결국 이미 어떤 틀에 얽매여 있다는 것 아닌가. 그것을 굳이 무엇이라고 말하진 않겠다. 나는 다만, 그것들로부터 뚝 떨어져서 아주 사소한 풀꽃 같은 쓸쓸함을 배우고자 한다. 과거 한때 젊은 날처럼 허무주의자가 되고 있다는 것. (작가 인터뷰 중에서)
<마들역 1번 출구>
바람 불면 시가 왔고 시의 행간에 바람이 머물다 갔다
밤이 되면 밤이 또 시가 되었다
나는 바람과 밤의 비공식 대변인이 되었다
원외 대변인이었다
마들역 1번 출구에서 맞닥뜨린
체육복 입은 여중생의 육성을 받아 적을 때도 있다
“죽어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단모음이었던가? 이중 모음이었던가?
그게 그렇게 단순한 음운의 문제가 아닌 것만 같다
네가 죽어도 아니 되고
네가 죽여도 아니 되는 일이거늘!
시는 수사나 기교가 아니라 사람의 말일 때가 있다
나는 어느 여중생의 깜짝 대변인이었다
비 소식 같은 것도 없었지만
비도 오고 바람도 부는 날이었다고 기록할 것이다
시가 나보다 먼저 받아쓸 때도 있다
<송시 포구>
무슬목 가기 전 유턴해서 들른 송시 포구 가까운
b 카페
커피보다 저 포구의 풍경
포구보다 저 앞의 섬
저 앞섬보다 요 앞의 더 쇠기 전의 억새 군락지
억새보다 다시 저 앞의 섬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섬 하나
모두 다 무언가 제 것을 갖고 견디고 있었다
카페 창가에 앉아 나도 무언가 견디고 있었다
그 무언가
섬에서 노을 지기 바로 직전의 서쪽을 향해
어떤 외로움도 견뎌내고 있었다
어떻게든 견뎌내는 것!
그러나 외로움은 어떻게든 견뎌내는 게 아니다
외로움은 표 나지 않게 혼자 겪어내는 것!
혼자되는 것!
저 섬과 섬 사이 무언가 주고받는 것도 있었다
혼자 있음과 혼자 없음 같은 것!
[ 출판사 서평 ]
이른바 시에서 <관습적 인식>으로부터 벗어난 그곳은 아디인가. 그곳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그곳을 제3지대라 부르기도 그렇고, 오후 세 시쯤이라 부르기도 그렇고, 우선 급한 대로 빈집 같은 ‘공백’이라고 해 두자. 이 시집은 어쩌면 그 공백에 이르는 도정(道程)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굳이 어디에 도착하기 위한 여정도 아니다. 그냥 길 위의 시 같고 길 위의 시인 같고 길 위의 시집 같다고 하자. 다만, 어떤 틀에서 벗어나려는, 그 틀을 깨려고 하는 무모한 태도와 인식이 그 도정에서 조금씩 엿보일 것이다. 그것을 또 좀 시보다 좀 더 깊이 가라앉아 있는 말이겠지만 퉁 쳐서 그냥 ‘고독’이라고 하자.
시가 현실을 다운로드하여 다시 아주 납작하게 두들겨서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이라면 이 시집이야말로 아주, 아주 납작한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납작한 현실적인 것인 동시에 또 조금씩 어느 행간에선 슬몃 비현실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때때로 현실적 자아와 시적 자아의 자리가 꿈속이었다가 또 꿈 밖이었다가 그러하기 때문이리라. 또 이 시집을 횡단하고 있는 현실과 비현실의 만남과 어긋남도 종종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 꿈속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조차 꿈 밖이거나 현실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또 이 시집은 ‘현실적인 것으로의 재생산’이라고 할 수 있다.
[ 차례 ]
[ 작가 인터뷰 ] 고독의 즐거움
제1부 이 견딜 수 없는 것 때문에
한낮의 폭우 / 시월, 간월암에서 / 갯벌을 거닐던 까닭 / 파도리 해변에서 / 해미읍성 천주교 순교 터…에서 / 꽃지 낙조 / 길에서 만난 여자 / 누굴 욕하는 건 참 쉽다 / 나이 먹었다는 거야 / 이젠 이런 게 싫다고? / 새벽 다섯 시 반 / 비문증(飛蚊症) / 시는 거저 오지 않는다 / 또 한없이 작아지는 기억 / 어떤 외로움 곁에서 / 시를 이렇게 쓰는 시인도 있다 / 왕년의 가수를 위하여 / 가파른 산책길 / 어느 빵집이 사라진 이유 / 이 봄밤에 / 봄날의 풍경 / 봄날은 간다 / 진짜 싸나이 / 시의 침묵 / 애비의 웃음 / 상추쌈 / 그림자에 관한 잡념 / 살아있다는 것 / 이런 의문 / 한 사내가 바위 끝에 앉아 있다 / 콩깍지가 씐 시 / 물안에서 / 불온한 날을 위하여 / 무(無)깊이에 대하여 / 뒤늦은 고백 /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게 많다 / 이 견딜 수 없는 것 때문에
제2부 고군분투한다는 것
마들역 1번 출구 / 그리운 새 한 마리 / 사랑보다 진한 것에 대하여 / 사라지는 것과 떠나가는 것과 / 밤 산책길에서 생각한 것들 / 저 강의 깊이와 높이 / 사랑의 뿌리 / 칠십 줄 시인들은 어디서 시를 쓰고 있을까 / 목월을 생각하다 / 늙었다는 것 / 노원역 지하서점에서 / 웃고 있는 당신에게 / 시의 일 / 하루종일 내리는 비 / 산문시를 쓰고 싶을 때 / 산티아고 순례길 / 그림자 훔쳐보기 / 밤에 떠오르는 생각 / 나도 웃고 싶을 때가 있다 / 나비의 꿈 / 나목 / 저 간절한 것들 / 이런 여유 / 라면 한 끼 / 유월의 끝 / 백지 한 장 / 허난설헌 생가를 생각하다 / 칠월의 이방인 / 바람처럼… 떠도는 자에게 / 어두운 인사 / 가정법에 의한 시 / 사막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법 / 어떤 의자에 관한 신념 / 어느 학부모님에게 / 사랑도 그럴 때가 있다 / 시작 메모 / 옛 시인을 회상하는 방식 / 오해와 이해 사이 / 그대와 함께 춤을 / 어떤 정경이 심경이 되기까지 / 저 정신 나간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하나
제3부 다이소를 나오며
뭇 시인들의 근황 / 나무와 기억과 사라진 것들 / 빗소리 혼자 듣기 / 사노라면 / 맨발 걷기 / 날파리 같던 꿈 / 물밀듯이 / 울음과 웃음의 상관관계 / 다이소를 생각하며 / 꿈 없는 꿈 / 마늘 찧는 동안 / 그 사무실에 관한 단상 / 헌정 / 텅 빈 골목 / 마치 덜 꾼 꿈같은 / 너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 혼자 중얼거림 1 / 꿈 밖에서 / 칠월 하순 / 혼자 하는 일이란 이런 것이다 / 오늘처럼 / 비관에 대하여 / 메추리알 까는 시간 / 역사와 슬픔은 왜 반복되는 걸까 / 걷기 / 여기서 먼바다까지 / 얼굴 / 밤 산책하듯 / 한 줄 메모 / 카페 이름 생각나지 않을 때 / 시 한 줄 없이 / 풍경과 심경 / 끝까지 갔다는 것 / 태풍 때문에 / 남해 생각 / 단양에서 1박 / 빗소리 듣기 / 길을 걷다 1 / 길을 걷다 2
제4부 한낮의 지하철에 대하여
시인의 집 / 이 소동과 소음에 대하여 / 빈말 / 두물경 / 사랑의 뿌리 3 / 사랑의 뿌리 4 / 안과 밖 / 말 없는 꿈 / 폭우 속의 낮술 / 여름비 / 나의 웃음에 관해 생각함 / 반성의 한계 / 이것은 우울인가 사랑인가 / 용문사 길 1 / 돌아서기 전에 한 번만 더 돌아보자 / 고요한 것과 어두운 것 / 지하철…에서 / 남구로역 / 풀벌레소리보다 먼저 / 9월의 노래 / 시가 되지 못한, 불안한 하루의 기록 / 생각의 생각 / 하나도 식지 않고, 잊히지도 않는 것 / 유모차에 관한 단상 / 직선의 힘 / 사랑의 빛 / 할머니들한테 배워야 할 점 / 손 놓지 못한 것 / 시원한 인사 /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 꿈에 대한 생각 없음 / 한낮의 지하철에서 1 / 한낮의 지하철에서 2 / 한낮의 지하철에서 3 / 한낮의 지하철에서 4 / 한낮의 지하철에서 5 / 한낮의 지하철에서 6 / 한낮의 지하철에서 7 / 물멍 하던 사내 / 강릉행… ktx에서
제5부 자전거 택배 청년에게
누가 이렇게 많은 캔맥주를 마셨을까 / 초행길 걷는 맛 / 소돌항 명진이네 횟집 / 스프링 노트 / 계란 프라이 / 강릉역에서 / 조태일을 생각하다 / 아주 오래된 골목 / 사일런트 밸리 / 방금 시를 탈고한 것처럼 / 방금 시집을 주고 나서 후회막급이다 / 횟집 앞의 노인 / 그곳에 주정차 단속 카메라는 없었다 / 한낮에 조심해야 할 것 / 나는 싸움을 할 줄 모른다 / 바다로 가는 먼 길 1 / 바다로 가는 먼 길 2 / 시 다섯 편 썼는데 / 주먹이 운다 / 방파제 끝에서 춤추던 여자 / 십 분 동안 / 길고양이 싸움에 관한 목격담 / 옛 시인의 집 마루턱에 앉아 / 우암(牛岩) 아들바위에서 / 자전거 택배 청년에게 / 북유럽의 어느 시인에게 / 인왕산 초소 책방에서 / 아빠 축산 / 상계역 11번 마을버스 / 고양이 밥을 갖다놓던 아주머니의 마음 / 동일로 희망 부동산 앞에서 / 길 위에서 생각하다 / 안내견과 함께 길을 나선 청년에게 / 시의 첫 단어를 놓쳤다 / 꽃 한 송이 때문에 / 의정부 교도소 앞 카페 / 소설(小雪) 오후의 단상 / 대설 메모 / 계란찜에 관한 소회 / 용문사 길 2
제6부 웅천에서 3박 4일
여수 시편 / 가막만(灣) 노을 / 여수 밤바다의 한순간 / 오동도에 관한 풍경 혹은 심경 / 장도 / 오동도 시편 이전 / 오동도 시편 이후 / 향일암에서 혼자 / 향일암 뒷길 / 화태대교 건너서 / 화태식당 / 송시 포구 / 노을의 끝 / 웅천에서 3박 4일 / 무슬목 해변에서의 그 여자 / 시내버스 바닥에 떨어진 만 원짜리 지폐 한 장 / 12월, 통도사에서 / 보홀 시편 1 / 보홀 시편 2 / 보홀 시편 3 / 보홀 시편 4 / 보홀 시편 5 / 보홀 시편 6 / 보홀 시편 7 / 보홀 시편 8 / 보홀 시편 9 / 보홀 시편 10 / 오늘 하루 / 수락산 천상병 길 / 주문진 큰 다리 밑에서 / 꿈 밖에서 1 / 꿈 밖에서 2 / 꿈 밖에서 3 / 꿈 밖에서 4 / 꿈 밖에서 5 / 꿈 밖에서 6 / 남춘천 산책길에 관한 보고서 / 혼자 순댓국 먹던 여자를 위해 / 혼자 중얼거림 2 / 밤 산책길에서 / 모 계간지 읽고 남은 것 / 12월의 오후를 보내기 좋은 / 이런 걸 어디다 기록해야 할까
제7부 서해의 눈
장시에 관한 소견 / 근황 / 층계참에서 잠시 생각하다 / 꿈 밖에서 7 / 꿈 밖에서 8 / 7호선 이수역 / 우울한 날의 시 쓰기 / 7호선 이수역 이후 / 물오리의 산책 / 그냥 조금 더 궁금해서 / 노는 시인 / 오늘의 시 1 / 서해의 눈 / 북극 한파 있던 날 / 칠성사이다 탑차 / 시보다, 오후 한때 / 문우 만나러 가는 길 / 화정역에서 / 정발산 산책 / 산수유 곁에서 / 시는 누가 쓰고 누가 읽어야 하나 / 달항아리 / 생계형 시인 / 오늘의 시 2 / 장편(掌篇) / 아무것도 없는 시 / 반복적인 너무나 반복적인 것 / 이런 느낌 / 내 사랑 / 나무 / 혼자 읽고 잊히는 것 / 너무 쉽게 쓴 시 / 늦은 밤 영진항 걷기 / 신리천변에 대해 쓴 것 / 나무의 고요 / 꽃나무처럼 / 프랑스인 안나에게 / 이 전동차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 혼자 담배 피우던 남자 / 낙동강아 잘 있거라
제8부 2024년 2월의 우울에 관한 기록
부부 세탁소 풍경 / 내가 만약 화가였다면 / 불확실한 날들을 위하여 / 시의 제목 / 나무와 나무의 관계에 대하여 / 꿈 / 권태에 관한 유감 / 간밤에 내린 비 혹은 눈물 / 2024년 2월의 우울 / 검은 웅덩이의 역사 / 비가 1 / 비가 2 / 비가 3 / 비가 4 / 비가 5 / 비가 6 / 비가 7 / 비가 8 / 비가 9 / 비가 10 / 2월의 끝 / 외롭지 않게 혹은 도산대로 혼자 걷기 / 어느 무명가수를 위하여 / 안개의 나라 / 부질없는 과거에 대하여 / 말들이 숨어 있다 / 혼자된 나무 / 나만 알고 싶은 작가 / 있음과 없음에 대하여 / 꽃샘추위 / 헌옷 정리하기 / 꿈속에서 1 / 꿈속에서 2 / 꿈속에서 3 / 꿈속에서 4 / 고요한 강 / 남도의 고요 / 강가에 서서 / 겸재의 그림을 보며
제9부 벽 혹은 끝까지 가라
잔치국수 / 국숫집에서 / 이런 날도 있다 / 극에 달한 반성 / 나의 반성은 반성하지 않는다 /
벽 1 / 벽 2 / 벽 3 / 벽 4 / 벽 5 / 벽 6 / 벽 7 / 봄비 / 늙은 떠돌이의 침묵 1 / 참을 수 없는 것 / 건대입구 6번 출구 / 끝까지 가라 / 작은 침묵 / 더 작은 침묵
제10부 오래된 농담
농담 / 시인 둘이서 걸어야 시가 되나 / 난해한 기억이여 / 밤을 노래하다
[ 지은이 강세환 ]
강원도 주문진 출생. 1988년 ≪창작과비평≫ 겨울호 통해 작품 활동 시작함. 시집 ≪이 단순하고 뜨거운 것≫ 등과 산문집 ≪시의 첫 줄은 신들이 준다≫(전 2권) 등 있음.
[도서명] 풍경과 심경
[지은이] 강세환
[펴낸곳] 경진출판
변형국판(140×210) / 524쪽 / 값 31,000원
발행일 2024년 10월 30일
ISBN 979-11-93985-37-3 03810
분야: 문학 >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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