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서의시 012 강세환 시집
시가 되는 순간
[ 책 소개 ]
삶의 순간과 시의 순간 그리고 시가 되는 순간
강세환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시가 되는 순간≫이 <예서의시 012>로 출간되었다. 이 시집은 삶의 순간이 시의 순간이 될 수밖에 없는, 시의 순간이 삶의 순간이 될 수밖에 없는, 시인의 섬세한 감수성과 직관(直觀)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삶의 순간과 그 시의 순간은 곧 어김없이 시가 되는 순간이 되었다. 특히 눈여겨 볼 부분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형상화한 ‘허구(虛構)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 시집에서 돋보이는 시인의 새로운 문학 장(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시인의 폭넓은 시야와 삶의 현장과 시에 대한 일관된 태도 등을 곳곳에서 맞닥뜨릴 수 있다. 권말 인터뷰, 또한 이 시집에서 들을 수 있었던 시인의 또 다른 버전의 육성이라고 할 수 있다.
[ 시인의 말 ]
시가 오는 순간이라고 해도 다 시가 되는 순간은 아니다. 그러나 시가 되는 순간은 다 시가 오는 순간이다. 그럴 땐 총 맞은 것처럼 몸이 다르고 몸이 먼저 알아챈다. … 이제 시의 삶도 시인의 삶도 마치 가게를 등지고 서서 지나가는 행인이나 쳐다보는 어느 생계형 가겟집 주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를 테면 어떤 날은 손님처럼 가게 안의 의자에 앉아 있고 어떤 날은 도둑처럼 가게 앞을 왔다갔다한다. (1부에서 3부와 4부의 시들은 약간의 터울이 있다. 4부의 시들이 앞의 시들보다 먼저 시가 된 것이지만 앉다 보니 맨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2020년 11월)
[ 책 속으로 ]
<근황>
-k에게
꼰대로 살았으니 꼰대가 되는 거
나이 먹어 더 늙을 일만 남은 거
사막의 초기 기독교인들처럼
어떻게 늙지 않을 수도 없고
기도를 하든 사나흘 금식을 하든
나이 먹고 더 늙어도 늙지 않기를!
어느 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삶이란 개새끼가 되어 가는 것!
일주일에 한 번씩 술을 마시고
이틀은 집콕하며 누워 지내고
3주 연속 줄줄이 내리 마시고
누워 있다 보면 늙어 가는 것도 아니고
개새끼가 되어 가는 것도 아니고
시인이 되어 가는 것도 아니고
헛헛한 웃음이 되어 가는 것도 아니고
이 외로움만 더 낯설어지는 거
<길동무>
등산모를 쓴 남자 둘이서 걷고 있었다
앞의 남자는 왼쪽 팔이 허리춤에 걸려 있고
뒤의 남자는 앞의 남자를 뒤따르고 있었다
앞의 남자는 왼쪽 다리도 불편했다
나는 그들의 속도를 앞지르지도 못하고
맨 뒤의 3번 남자가 되어 걷고 있었다
다시 등산모 1번 남자와 2번 남자 사이엔
등산모자 두 개만한 간격으로 띄어져 있었고
등산모 2번 남자와 3번 남자 사이엔
팔을 쭉 뻗으면 닿을 만한 간격이었다
2번과 3번은 팔을 뻗을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암튼 등산모 남자 1, 2와 남자 3은
그렇게 길동무가 되어 길을 걷고 있었다
이번엔 야구 모자를 쓴 4번 남자가
등산모 2번과 남자 3번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2번과 3번은 남자 4번을 중간에 끼워주었다
남자 1번, 남자 2번, 남자 4번과
나까지 남자 넷이서 이렇게 걷고 있었다
나는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다
모자 넷이서 한 줄로 걷고 있었다
그때 5번 남자는 게송을 읊으며 뒤쫓아오고 있었다
그의 걸음은 4번 남자를 따르는 게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5번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냥 중절모였고 말하자면 1번 남자였다
그는 처음부터 그들과 줄이 달랐다
수락산 이 산책길에서 시인 김종삼을 만났던
오늘의 소사(小史)를 혼자 기록하고 지우다
<물안개의 향방>
저 안개라도 한 입 가득 물고 있어야 할 것만 같다
안개가 없으면 맹물이라도 한 입 가득 물어야 할 것 같다
맹물이 없으면 침이라도 삼켜야 할 것 같다
-좀 잊고 살아도 될 것: 원통사 삼층보탑 낙성식, 상봉~동해 고속철도 승차권 예매율, 21대 4월 총선 지역별 정당 득표율 및 의석수, 지난 밤 꿈자리, 남신의주 강우량, 독일 뮌헨 불이선원 불사 소식, 3월 소비심리 지수,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1980년대 시인들의 동정…
없던 안개가 잠시 안개가 되기 위해 입에 가득 물었던 맹물을 또 뱉어내거나
능선의 잔설이라도 녹여 바람의 어깨에 얹어 놓고 후후 날려보내야 하겠다
안개가 후후 날다 한쪽으로 휩쓸려 몰려가는 새벽엔
시린 손을 맨가슴에 쓰윽 집어넣듯 다시 저 능선에 손이라도 뻗어
이번엔 안개의 등이라도 흔들어 안개를 떠밀어내야 한다
안개여 어서 가렴!
더러는 떠밀려서 또 강변을 떠도는 물안개가 되거나
가난한 시인의 집 창문 앞에서 머뭇거리거나
도처에 노숙인처럼 숨죽인 채 숨어 사는 안개가 되거나
몇몇은 새벽부터 물안개에 취해
서로 말을 높였다 낮췄다 하면서
귀 기울여 엿듣다 보면
말을 높이는 자는 계속 높이고 말을 낮추는 자는 계속 낮추고
취한 것과 취하지 않은 것과 또 높은 것과 낮은 것도
안개가 한번 킁킁거리며 무슨 짐승이라도 된 것마냥
한 호흡하고 나면
물안개는 바위를 삼키거나 눈앞의 뻑뻑한 풍경이 되거나 마침내 동해 먼 바다의 높은 파도가 되거나
안개의 힘이 닿지 않는 계곡의 나직한 물소리가 된다
[ 출판사 서평 ]
이 시집은 ‘시가 되는 순간’을 통해 ‘삶의 어느 한 순간’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를 테면 제1부에서 제3부까지 실린 개별 시편들을 보면 평범한 일상적 삶에서 삶을 견디며 삶을 밀고 나가는 혹은 삶을 감수하는, 시인의 사유와 태도가 잘 구사되어 있다. 그리고 시에서 무언가 힘을 주어야 하고, 시에서 무언가 힘이 있어야 하고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통념에 대해서도 조용히 항변하고 있는 것도 같다. 오히려 그러한 힘에 대해 그러한 삶에 대해 관조하고 다시 한 번 그러한 힘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 준다. 그리고 그러한 계기는 시적 상황이나 시적 의미에 의해서도 가능하겠지만 언어 예술적 표현에 의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이 시집은 보여주고 있다. 그 또한 이 시집이 도달한 문학적 지점이며 문학적 지향이기도 하다. (시인의 삶과 상상력 또는 허구가 만나는 즐거운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 시집은 시의 순간이면서 동시에 삶의 순간을 잘 포착하여 시의 순간과 삶의 순간을 동시에 잘 복원한, 시인의 감수성과 통찰력에 의한 결과물이다.
또한 시와 삶의 간극을 좀 더 가깝게 아우르는 시적 미덕이야말로 시와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시와 삶의 만남의 기쁨이 될 것이다. 또한 시인은 초기 시에서부터 오랫동안 일관되게 주목하고 있는 민중들의 삶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이번 시집에서도 그 성취를 얼마간 엿볼 수 있다. 그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거론한다면 제4부에 실린 시편들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될 것이다. 덧붙여 오랫동안 시의 현장에서 혹은 변방에서 시인의 정서와 감성을 잃지 않고 전력투구한 그 성과물을 제출하고 있다는 것도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부분일 것이다.
[ 차례 ]
근황
제1부
봄, 꿈 / 길동무 / 물안개의 향방 / 어떤 말도 못하는… 이 저녁에 / 수첩 생각 / 웃기 / 시인들은 남의 시를 얼마나 읽을까 / 보이지 않는 것 / 총 맞은 것처럼 / 물 먹은 인사들의 정경 / 4월 초하루 / 오늘의 문답 / 그 남자 / 이런 약속 / 쓸데없는 / 아프리카 혹은 먼 바다 / 철원… 에서 / 한 여름 밤의 꿈 / 꿈 밖에서
제2부
안목바다 / 시에 취하다 / 무엇 때문에 / 어떤 관계 / 쉿! / 목례 / 인연 / 그런 시간 / 아귀의 뼈 / 멀쩡한 나무 / 여기까지? / 우울의 유혹 / 이해와 오해 사이 / 화분을 깨뜨리다 / 비대칭의 시 / 모래 바람 / 봄밤 / 육십 다섯 지나 / 문어 / 여기 한 표
제3부
아무것도 없다 / 변산 / 내일이 없다 / 백두대간에 사는 내 친구 / 새벽 네 시 / 무제 시편 / 공원 같은 개 같은 / 갈 수 없는 길 / 일기예보 / 시인의 밤길 / 휠체어가 보이는 창밖 / 고립무원 / 중랑천에서 / 쓴맛? / 한낮의 봄비 / 봄비 이후 / 없는 시 / 시를 견디는 것 / 헛것
제4부
이 시는 어떻게? / 모자 / 고양이의 날 / 동해고속버스에서 / 교보문고에서 / 정진관 입구에 앉아 있던 한 사람 / 마장역 3번 출구 / 뜬구름 1 / 뜬구름 2 / 뜬구름 3 / 겨울밤 새벽 세 시 / 맨날 / 당신의 나무
<인터뷰> 시 쓰기의 즐거움 혹은 자존심
[ 지은이 강세환(姜世煥) ]
1956년 강원도 주문진에서 태어났다. 1988년 ≪창작과비평≫ 겨울호 시 <개척교회> 등 6편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하였다. 시집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면벽≫ ≪우연히 지나가는 것≫ ≪앞마당에 그가 머물다 갔다≫ ≪벚꽃의 침묵≫ ≪상계동 11월 은행나무≫ ≪바닷가 사람들≫ ≪월동추≫ 등과 에세이집 ≪대한민국 주식회사≫를 상재하였다. 현재 노원도봉 ‘북토크’ 시민모임에서 행사, 기획 등 총괄하고 있다.
[도서명] 시가 되는 순간
[지은이] 강세환
[펴낸곳] 예서
변형 국판(128×210) / 152쪽 / 값 10,000원
발행일 2020년 12월 15일
ISBN 979-11-968508-4-5 03810
분야: 문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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