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생각씨앗을 마음밭에 심다
이 시집은 일상에서 드러나는 변화무쌍한 생각을 담담하게 바라보거나 달래기도 하면서 ≪바라나시의 새벽≫에 모두 담았다. 마음이 힘들 때는 시간만한 명약(名藥)이 없다. 그러나 그 명약은 단방처방전으로 구할 수 없다. 바라볼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때로는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을 깨닫게 해준 도반이자 등불은 사람과 봄·여름·가을·겨울이 아낌없이 보여준 생생한 사실이다. 이 시집은 이것들을 흠뻑 받아들이면서 쓴 고마움의 시집이다.
≪바라나시의 새벽≫은 살아가면서 부딪히면 잠시 비켜 물러서고, 갈등하면서 익어가는 시간을 하나씩 풀어놓은 시집이다. 손가락 하나로 컴퓨터 창을 열면 쓰레그물로 쓸어 담아서 거대한 산이 된 정보들이 우리의 지식을 넘치도록 충족시키고 있다. 그러나 삶은 현실이고 부딪히는 일상은 몸으로 움직여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더 많다. 수만 마리의 정자 중에서 선택된 한 마리의 일생은 어쩌면 도태된 수만 마리의 삶이 응축되어 있다. 제대로 사는 일이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그 만만하지 않은 것을 시인은 <무탈(無頉)>에서 조심스럽게 펼쳐 놓는다. 바다의 표면이 잔잔해도 그 속에는 서로 다른 생명체들이 서로 엉킨 듯 더불어 물길을 만들며 때로는 돌아서 흐르는 것을 본다. 나무에 청진기를 갖다 대면 굵은 줄기에는 우리 심장이 건강하게 뛰는 소리가 나고, 옹이가 있는 곳에서는 멈칫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사람이 사는 세상도 다르지 않다. 겉모양이 똑같은 사각 상자의 아파트,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사연으로 소설책 한 권은 족히 쓸 분량을 품고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꽃길도 사람의 다양한 감정과 관계에서 서로 배려하고 소통하지 않으면 걸을 수 없다. 어려운 여건이 앞을 막을 때도 지혜롭게 잘 어우러져서 흘려보내면 탈이 없고,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헝클어진 현실일 뿐이다.
<강이 문을 열다>는 해빙기의 북한강 강가, 물밑 어딘가에서 우렛소리가 부서지듯 달려가면서 사라지는 소리를 난생처음 듣고 깜짝 놀랐다. 시린 빛깔로 겨우내 꽁꽁 얼어 있던 강에 얼음이 녹을 때는 표면은 싸락눈이 내린 것처럼 약간 들뜬 하얀색으로 변하는데 그것은 봄을 부르는 강의 몸짓이었다. 굳은 것과 부드러운 것의 경계선이 허물어질 때는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두 큰 진통이 있게 마련이다. 마음에서 벽이 허물어질 때 박하사탕을 먹으면 입안이 시원하고 개운한 향기가 가득한 느낌 그대로였다.
<쿠션언어> <난 널 이해해> <다시 쓰다> <쌓을수록 낮아진다> <사는 모습이 경전이다> 등은 길들여진 언어의 허상에 갇혀 그것을 진심이라고 믿었던 어리석은 자신을 수없이 헹구면서 마음터가 야물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에는 많은 말과 긴 글이 필요하지 않았고 꾸밈없는 마음 씀씀이와 정성 어린 행위가 있을 뿐이다. 복잡하고 다변한 현대의 사람살이라 할지라도 계산보다 더 우선순위에 둘 것은 마음을 바로 쓰고 사는 일이 아닌가. 아버지는 어릴 적에 항상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셨다. 그 습관 덕분에 <새벽달>은 어른이 되어서도 음력 보름날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만나기도 한다. 빛나지 않으면서 눈부신 자태에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한다. 사춘기부터 무척 닮고 싶은 인품(?)이기도 했다. 상현달에서 보름달로 차오를 때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젊은 혈기처럼 거침없이 산마루를 오르는 듯 보이지만,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음력 보름을 넘어선 달님은 그냥 그야말로 널널한 푸근함뿐이다. 새벽 달빛은 밤새 어둠을 밝히면서 걸어도 지치지 않고 더 맑아지는 청복(淸福) 그 자체로 다가왔다. <시월햇살>은 불볕과 태풍의 여름 고개를 힘겹게 넘는 동안 인내하면서 깨달은 자비를 두루 나누면서도 조금도 줄지 않는 마술 같은 따뜻한 마음곳간이었다.
<산이 울다> <큰오빠> <딸> <꽃전> <봄동꽃이 피기 전>은 끈끈한 정(情)을 만날 수 있다. 지금은 뵐 수 없는 부모님, 너무 엄한 엄마가 싫어서 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징검다리 건너듯 멈칫거리며 냉랭하기도 했다. 흉보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듯이 어느새 다시 돌아와 길들여졌던 언저리에 서성이는 나를 만날 수 있다. 종교를 넘어서는 것이 마음을 잘 쓰고 사는 일이라고 믿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이 가장 귀하다. 그러나 몸은 정해진 유효 기간이 있는 생물이다. 또한 생각은 하루에도 수없이 싸돌아다닌다. 이 진수성찬의 길 위에서 생각과 몸이 편식으로 길들면 사람 속에서 섬이 되고, 감정에서는 더 외딴섬이 될 것이다. 아주 작은 것에도 꽃비 속을 거닐 듯 행복해하고, 큰 상처에는 의외로 대범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연민스럽게 바라보기도 하면서 <길을 걷는다>에서처럼 시인은 그렇게 걷고 있다.
[ 책 속으로 ]
<무탈(無頉)>
바람 불지 않은 한 해 없었다
마음먹은 대로 다 이루어진 한 해도 없었다
무슴슴한 한 해도 없었다
입안에 혀 같은 인연은 더더욱 없었다
내 마음도 나에게 그랬다
숨이 차면 느리게 걷고
말[言]이 말[馬]이 되어 달리면
말[言]을 쉬게 하고
슬픔이나
아픔이나
외로움이 손을 내밀면
낯설지 않은 숨처럼 보듬고
더 슬프고 아프지 않아
고맙다고 다독인다
거친 바람 앞에서는 몸을 낮추고
흔들리면서도
길을 잃지 않고 걷는다
느리게
<큰오빠>
술기운이 거나하게 사람을 어르는 밤
땅을 흔들며 집으로 오는 발걸음
가슴에 꼭 안긴 누런 종이봉투는
구겨져서 울상이 되었다
부산역 맞은편 화교 마을 화덕에서
바싹 구운 속이 텅 빈 빵
말수가 적어 무뚝뚝하기 그지없지만
얼굴에 불그레한 술꽃이 피면
달콤하고 부푼 말이 술술 새어 나왔다
잠사태 나는 눈꺼풀 밀어 올리며
빵보다 먼저 배부르게 먹던
오라버니 따뜻한 마음
간간이 짖어대던 누렁이와
산마루에 걸터앉은 달님도
혀 꼬인 목소리 아련하게 들었다
빵보다 달달하고 따뜻한 속마음
수십 년이 흘러도 지지 않는 꽃
<사는 모습이 경전이다>
수만 글자가 빼곡하게 앉은 책
읽고 또 읽으며 기대었다
어느 날 거센 폭풍우가 몰아친 터전
내 일처럼 보듬어주는 손길
버겁도록 생채기를 남기고 떠나는 사람
얇은 언어로 소설을 써서 흩뿌리는 사람
애써 무덤덤한 눈빛
낯익은 것들이 낯설게 떠난다
먼지 나도록 기대었던
책 속 글자들은 표정 없이 누워 있다
다급하고 절실한 순간
사람 모습에 경전이 펄떡거린다
[ 시인의 말 ]
늘
잊지 않았던 길을 나섰습니다
그 길목에서 만난
희노애락의 일상이 오늘입니다
마음통장에 남겨진 잔고가
쓰면 쓸수록 넉넉하게 불어나서
따뜻하게 나눌 수 있도록
더 단순하고
낮게 걸어가겠습니다
만사만물에 고맙습니다
[ 차례 ]
처음
제1부
강이 문을 열다/ 봄마중꽃/ 무탈(無頉)/ 산수유나무 꽃문이 열릴 즈음/ 쑥떡/ 삼월에 내리는 눈/ 사월/ 카란을 꿈꾸다-팬데믹에 갇힌 젊음에/ 그냥 가보고 싶었다/ 시간/ 마이 아푸다/ 말빚/ 사람의 길/ 바라나시의 새벽/ 수종사 나한신종꽃의 말/ 고분화엄사 하수구/ 큰길/ 낮달
제2부
쿠션언어/ 쌓을수록 낮아진다/ 낙산사 무료 국수 공양간/ 차를 마시다/ 성전니르바나로 가는 길/ 난 널 이해해/ 봄동꽃이 피기 전에입과 주둥아리/ 사는 모습이 경전이다/ 새벽달/ 전화벨이 울리는 동안/ 불이, 코로나19 미뉴에트에 맞추어/ 무지정답/ 폐사지에서/ 부처가 된 느티나무/ 잡초는 위대하다/ 산이 울다/ 염주
제3부
붉은 지심도에서/ 쇠백로/ 고목-500살 된 수종사 은행나무/ 오미자 차입추 전날/ 광장시장 먹자골목/ 구절초/ 말실수/ 아기 방귀/ 가을밤/ 꿈꾸는 불씨/ 갈대가 사는 법/ 겨울 바다에 꽃이 피다-KBS 인간극장, 푸른 바다의 전설/ 외할머니의 수의슬픔/ 다시 쓰다/ 중국 오대산 북대에서/ 오늘은 누구세요?/ 잉걸불/ 눈제
제4부
니 맘 내 맘/ 큰오빠/ 열매달/ 시월 햇살/ 가을 연지에서/ 이환이/ 제주도/ 열다섯 살의 달밤/ 내가 졌다/ 딸/ 이웃/ 하얀 저물녘/ 조개구이/ 겨울새들이 날아간다/ 사랑해서 미안해요/ 가벼운 힘/ 엿/ 꽃전/ 길을 걷는다
[인터뷰] 꽃 한 송이 혹은 불교적 세계관
[ 출판사 서평 ]
이 책은 김미형 시인의 2010년 두 번째 시집 ≪인연이 흐르는 강≫을 펴낸 이후의 흔적이다. 시인은 때로는 알고도 모르는 척 ‘설마’, ‘혹시나’ 하는 생각씨앗은 잘 자랄 리가 없는 데도 어리석게 합리화시켜서 마음밭에 심었다. 그 과정에서 겪은 모든 것은 빈틈없는 인과(因果)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고 있음을 속속들이 알아차렸다. 때로는 휘청거리면서도 길을 잃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시간을 시인은 세 번째 시집으로 세상살이 사람들과 만난다.
문학의 중심에는 늘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의 치열한 삶에 위로와 용기와 희망이라는 필수 영양소를 공급하는 것이 문학이 아닐까. 화려하고 달곰한 언어가 넘치거나 또는 담박한 문장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따뜻함이 배어 있어야 한다. 더러는 시인의 시를 아포리즘 시라고 말한다. 밖으로 드러나는 표정과 행동의 마음곳간, 그 소중한 곳에서 솟는 생각이 사람의 흔적으로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힘들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숨 한 번 크게 쉬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뾰족한 생각을 안으로 돌리면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 급하게 세어보아도 열 개는 넘는다.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순간, 움츠렸던 마음 한 모퉁이가 다시 무리 속으로 들어와 서서히 평온을 찾게 된다. 문명과 과학이 빛의 속도로 놀랍게 발전하고 있지만, 생각은 생물처럼 살아서 아날로그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곳이 이 시집에 있다.
[ 지은이 김미형 ]
경남 남해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시집으로는 ≪내 안에 있는 너≫, ≪인연이 흐르는 강 ≫을 출간하였으며, 가곡으로는 <바람이 전하는 말>, <가족>, <두물머리 연가>, <진양호에서> 외 다수가 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서정문학연구위원, 강동문인협회, 현대불교문인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도서명] 바라나시의 새벽
[지은이] 김미형
[시리즈] 예서의시025
[펴낸곳] 예서
변형국판(128×210) / 120쪽 / 값 12,000원
발행일 2023년 04월 30일
ISBN 979-11-91938-48-7 03810
분야: 문학 >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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